2024년 12월 8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지난 54년간 이어진 아사드 가문의 독재가 막을 내렸다. 반군 연합체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수도를 장악하고, 바샤르 알아사드는 러시아로 도피했다. 그와 동시에 13년간 이어진 시리아 내전이 아사드 정권의 붕괴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시리아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HTS는 민주화를 약속했지만, 과거 알카에다와 연계되었던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이다. 쿠르드족, 알라위파, 드루즈파 같은 소수 종파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을 침투했고, 터키는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리아는 또다시 외세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 중동은 끊임없이 전쟁과 독재, 혼란에 시달리는가? 그 답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음대로 국경선을 그으면서 시작된 비극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영국 장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 바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주인공이다.

1장. 제국의 몰락과 더티 플레이: 맥마흔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협정
오스만 제국의 말기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600년 역사의 끝자락에 있었다. 한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있던 대제국은 유럽 열강국의 세력에 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오스만은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벌써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맥마흔 선언 (1915-1916): 아랍인들에게 한 거짓 약속
1915년, 영국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와 비밀 서신을 교환했다. 이 서신에서 맥마흔은 후세인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어 영국을 도우면, 전쟁 후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인정하겠다.
이에 후세인은 아랍 부족을 규합해 오스만에 반기를 들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맥마흔의 약속은 모호했다. '아랍인의 독립 국가' 범위가 정확히 어디인지, 무엇이 포함되고 제외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이 포함되는가? 시리아는? 레바논은? 그렇게 영국은 의도적으로 의문점을 남겨두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 땅따먹기의 진실
맥마흔이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뒤에서 다른 계획을 짜고 있었다. 1916년 5월,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François Georges-Picot)가 비밀 협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중동을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갖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 팔레스타인 남부를 차지한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한다. 그 틈에 러시아도 일부 지역(터키 동부, 아르메니아)을 인정받았다.
이 협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주의적 땅따먹기였다. 아랍인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 국경선이 지역의 역사, 문화, 종교, 부족 구조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같은 이슬람교라 하더라도 시아파와 수니파는 엄연히 종파가 다른데 이들을 한 나라에 묶거나, 같은 부족을 두 나라로 쪼개버리기도 했다. 쿠르드족은 아예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하고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4개국으로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다.
벨푸어 선언 (1917):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
설상가상으로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가 또 다른 약속을 했다. 유대인 은행가 로스차일드 가문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영국은 각기 다른 국가들과 무려 세 가지 조약을 동시에 맺은 셈이다:
- 맥마흔 선언: 아랍인들에게 독립 약속
- 사이크스-피코 협정: 프랑스와 중동을 나눠 갖기로 약속
- 벨푸어 선언: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넘기기로 약속
이 세 가지 협정은 서로의 영토를 충돌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영국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 모든 협정을 강행했다. 이것이 중동 100년 혼란의 씨앗이었다.
2장.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웅인가, 제국주의의 첩자인가
옥스퍼드 천재에서 정보 장교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는 웨일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적 두뇌를 자랑했던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고고학이었으며, 중동의 십자군 성채를 연구하기 위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랍어를 배우고 아랍 문화에 깊이 빠졌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중동 지식이 영국 정보부의 눈에 띄었다. 1916년, 그는 이집트 카이로의 영국 정보부에 배속되었다. 임무는 간단했다. 아랍 부족을 규합해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는 것. 로렌스는 이 임무에 완벽한 인물이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아랍 문화를 이해했으며, 무엇보다 아랍인을 설득할 카리스마가 있었다.
파이잘 왕자와의 만남
로렌스는 우선 메카로 가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 파이잘 빈 후세인(Faisal bin Hussein)을 만났다. 파이잘은 카리스마 있고 야심 찬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고, 로렌스는 파이잘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영국과 함께 오스만을 물리치면,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다.
파이잘은 이를 믿었고, 로렌스 역시 진심으로 그를 대했다. 적어도 영국 정부의 속내를 알기 전까지는. 로렌스는 아랍 부족의 전통 복장을 입고 그들과 함께 사막을 횡단했다. 그런 로렌스의 태도는 아랍인들에게 호감으로 다가왔고, 이내 아랍 부족들은 이 금발의 영국인을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아카바와 다마스쿠스: 전설의 시작
1917년 7월, 로렌스와 파이잘의 아랍군은 대담한 작전을 수행했다. 바로 홍해 연안의 항구 도시 아카바(Aqaba)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오스만군은 바다 쪽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로렌스는 사막을 횡단해 뒤쪽에서 기습했다. 그 결과 아카바는 함락되었고, 로렌스는 영웅이 되었다.
이후 아랍군은 계속 진격하여 1918년 10월 1일,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의 수도가 해방된 것이다. 파이잘은 다마스쿠스에서 아랍 왕국을 선포했다. 로렌스는 그 옆에 서 이들을 지지했고, 이제 약속대로 아랍인의 독립 국가가 세워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배신과 좌절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파이잘은 아랍 대표로 참석했고, 로렌스는 그의 통역이자 조언자로 동행했다. 하지만 회의장에서 그들이 본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시리아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고,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은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파이잘의 아랍 왕국은 인정받지 못했다. 설상가상 1920년,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파이잘은 쫓겨났다.
로렌스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로렌스는 자신이 아랍인을 속인 제국주의의 첨병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지혜의 일곱 기둥』과 비참한 말년
로렌스는 1922년, 자신의 경험을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아랍 반란의 역사이자, 로렌스 자신의 내면 고백이다. 그는 아랍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시에 자신이 그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토로했다.

그 후 로렌스는 명성을 피해 도망쳤고, 가명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평범한 병사로 살다가 1935년 5월 19일,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46세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고인지 자살인지 논란이 있다. 로렌스는 평생 자신이 저지른 '배신'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장. 중동 국가들의 탄생: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국경선
1918-1922: 전후 처리와 국경선 확정
1918년,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중동을 나눴다.
- 프랑스: 시리아, 레바논
- 영국: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
위임통치(mandate)라는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라는 명목으로 이들 지역을 지배했다.
1919-1922: 터키 공화국의 탄생
오스만 제국 본토인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도 분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스는 서부 해안을 차지하려 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일부 지역을 요구했다. 그 타이밍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가 등장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1919-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군을 격파했고, 1922년 11월 1일, 술탄제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1923년 10월 29일, 마침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터키를 세속 국가로 개혁했다. 그 결과 터키는 중동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분할을 막아낸 나라가 되었다. 이는 강력한 군사력과 민족주의 덕분이었다.
1920: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의 비극
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 소수민족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1917년, 오스만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Armenian Genocide)을 저지르기도 했다. 1918년, 아르메니아는 잠시 독립했지만, 1920년에 소련이 침공하며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에야 비로소 독립했다.
아르메니아가 소련의 침공을 받던 해, 쿠르드족에게는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승전국들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며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중 62조부터 64조까지 쿠르드족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었다.
- 62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들이 조약 발효 6개월 내 쿠르드족 지역의 자치 방안 마련
- 64조: 1년 내 쿠르드족은 투표를 통해 터키로부터 독립 여부를 결정할 것
이는 국제 사회가 쿠르드족을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인정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아랍 민족은 여러 국가를 세웠으나, 쿠르드족만은 그들의 영토인 쿠르디스탄이 터키의 지배 아래 남겨졌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터키 독립전쟁을 벌였고, 영국은 쿠르드 독립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1922년 10월 11일, 무다냐 휴전협정으로 세브르 조약은 재협상 대상이 됐고, 1923년에 로잔 조약이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며 쿠르드족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결국 쿠르드족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네 나라에 소수민족으로 분할됐다. 쿠르드족의 동의 없이 새로운 국가들의 주권이 그들 위에 덧씌워졌다. 현재 쿠르드족은 약 3천만 명으로, 세계 최대의 국가 없는 민족이 되었다.
1921: 하심 가문과 중동 왕국들
영국은 파이잘을 다마스쿠스에서 쫓아낸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이라크 왕 자리를 주었다. 그의 형 압둘라 빈 후세인은 트란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 왕이 되었다.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는 헤자즈(사우디아라비아 서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왕국은 독립국이 아니었다. 영국의 보호령이자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실권은 영국 고문관들이 쥐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왕들이 지역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이잘은 메카 출신이었지만 이라크를 통치했다. 압둘라는 요르단인들에게 외부인이었다.
1932: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헤자즈 왕 후세인의 자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네즈드(중앙 아라비아)의 부족장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Abdulaziz Ibn Saud)가 침공하며 후세인은 쫓겨났다. 대신 그는 1932년,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합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우디는 황량한 사막일 뿐이었다.
그러던 1938년, 사우디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 이는 게임 체인저였다. 사우디는 순식간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미국은 사우디를 중동의 핵심 동맹국으로 삼았다. 오늘날까지 미국-사우디 동맹은 중동 정치의 축이다.
1944: 시리아의 독립
시리아는 프랑스 보호령이었다. 1920년 파이잘이 쫓겨난 후, 프랑스는 시리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알라위파, 드루즈파, 수니파를 서로 분리하여 분열을 조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시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1944년, 프랑스가 철수하면서 시리아는 독립했지만 정치적 불안은 여전했다. 1949년에만 3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가 정권을 독점하며 독재와 공포 정치가 나라를 좀먹어 갔다.
그러던 1970년 11월 13일, 시리아 공군 사령관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알라위파(시아파의 한 분파)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시리아 인구의 12%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하페즈는 철권통치를 했다. 1982년, 하마 학살에서 무슬림 형제단 봉기를 진압하며 2-4만 명을 죽였다. 2000년, 하페즈가 사망하자,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권력을 세습했다. 54년간 이어진 아사드 가문의 독재였다.
1948: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비극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은 영국에 벨푸어 선언의 이행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팔레스타인을 침범해야 했기에 영국은 골치 아픈 문제를 UN에 넘겨 버렸다. 이에 UN은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자 주변 아랍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이 이를 반대하며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제1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고 끝이 났고, 팔레스타인인 70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그러던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설되었다. 초대 의장은 아흐마드 슈케이리였지만,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이 되면서 PLO는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PLO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벌였고, 일부는 테러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이 일대는 1956년 수에즈 위기, 1967년 6일 전쟁, 1973년 욤 키푸르 전쟁까지 총 4차례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1960년대: 쿠웨이트의 독립
쿠웨이트는 1899년부터 영국 보호령이었다가 1961년 6월 19일, 독립했다. 작은 나라지만 막대한 석유 매장량으로 부유해지자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역사적으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분쟁에 영국이 개입해 이라크의 침공을 막았다. 그 후 쿠웨이트는 아랍 국가 간 분쟁 중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듯 석유 수입으로 부유해진 쿠웨이트는 꾸준히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오고 있다.
1970년대: 석유와 중동의 부상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후,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무기화(oil weapon)를 사용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석유 가격을 4배로 올리며 오일쇼크가 발생했고, 세계 경제가 휘청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란이 중동 패권을 잡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원래 9개 토후국이 연합할 계획이었지만, 카타르와 바레인이 단독 독립하면서 7개 토후국(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지만, 움알쿠와인, 라스알카이마, 푸자이라)이 연합했다. UAE는 석유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특히 두바이는 관광과 금융 중심지로 발전했다. 오늘날 두바이는 중동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 하나다.

4장. 전쟁의 세기: 소련-아프간, 이란-이라크, 걸프전, 9.11, 아랍의 봄
1979-198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 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했다. 하지만 이슬람 반군(무자헤딘)이 저항했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소련은 아프간의 정치 불안이 중앙아시아 이슬람 공화국들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하지만 소련은 수렁에 빠졌다. 무자헤딘은 미국, 사우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벌였다. CIA는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했고, 무자헤딘은 소련 헬리콥터를 격추했다. 10년간의 소모전 끝에 1989년 소련군이 철수했다. 이 전쟁은 소련 경제를 무너뜨렸고, 1991년 소련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지원한 무자헤딘 중 일부는 나중에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되어 미국을 공격했다.
1980-1988: 이란-이라크 전쟁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이란의 혁명이 이라크 시아파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을 선제 공격했다. 8년간의 전쟁은 참혹했다. 화학무기가 사용되었고, 인명 피해는 100만 명을 넘었다. 1988년 유엔 중재로 휴전했지만, 뚜렷한 승자 없이 끝났다. 양국 모두 경제가 파탄 났고, 수십만 명이 죽었다.
1990-1991: 걸프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막대한 빚을 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했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역사적으로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루마일라 유전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은 즉각 대응했다.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미국 주도)이 이라크를 공격했다(사막의 폭풍 작전). 100시간의 지상전 끝에 이라크군은 패배했다. 쿠웨이트는 해방되었다. 걸프전 이후 중동 질서는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미국은 사우디에 영구 군사 기지를 설치했다. 이것이 나중에 오사마 빈라덴의 분노를 촉발한다.
1996-2001: 탈레반 정권
소련군이 철수한 후 아프가니스탄은 혼란에 빠졌다. 무자헤딘 파벌들이 서로 싸웠다. 1996년, 이슬람 신학생(탈레반)들이 몰라 모하마드 오마르의 지도 아래 권력을 잡았다. 탈레반은 극단적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강요했다. 여성은 교육과 취업이 금지되었고, 음악과 영화가 금지되었다. 탈레반은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것이 9.11 테러로 이어졌다.
2001: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납치한 비행기 4대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을 공격했다. 약 3,000명이 사망했다. 오사마 빈라덴이 배후로 지목되었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빈라덴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탈레반은 거부했다. 2001년 10월 7일, 미국과 NATO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탈레반 정권은 2개월 만에 무너졌다. 2004년, 하미드 카르자이가 대통령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탈레반은 파키스탄 국경 지역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20년간 전쟁이 이어졌고, 2021년 8월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명령했다. 탈레반은 즉시 반격해 카불을 점령했다. 미군은 패주했다. 영국(19세기), 소련(1980년대)에 이어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했다.
2011: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가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에서 독재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아랍의 봄). 시리아에서는 2011년 3월, 다라 지역 어린이들이 "아사드 정권은 무너질 것"이라고 벽에 낙서를 했다. 정부는 아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정부군이 발포하면서 내전으로 번졌다. 내전은 13년간 이어졌다. 50만 명이 죽고 1,2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IS(이슬람국가)가 시리아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고, 미국과 터키는 반군을 지원했다. 시리아는 국제 대리전의 무대가 되었다.
2023-2024: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아사드 정권 붕괴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가자 지구를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대대적 보복에 나섰고, 가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란의 대리 세력인 헤즈볼라도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이란 혁명수비대를 공습했다. 이란과 헤즈볼라가 가자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원할 여력이 사라졌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리아를 돌볼 수 없었다. 이 틈을 노려 시리아 반군은 2024년 11월 대공세를 시작했다. 반군은 알레포, 하마, 홈스를 연이어 점령했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러시아로 도피했다. 54년간 이어진 아사드 가문의 독재가 끝났다.
에필로그: 로렌스의 비극은 반복될까?
2026년 1월 현재, 시리아는 과도기를 겪고 있다.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주도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래는 불투명하다. HTS는 과거 알카에다와 연계된 조직이다. 쿠르드족, 알라위파, 드루즈파 같은 소수 종파들은 불안해한다. 터키는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을 더 점령했다. 시리아는 또다시 외세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로렌스가 이 모든 것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100년 전 저질렀다고 생각한 '배신'이 여전히 중동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 것이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여전히 갈등의 근원이다. 쿠르드족은 여전히 나라가 없고, 팔레스타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몇몇 지역의 독재와 전쟁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중동 국가들은 서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터키는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균형을 모색한다. UAE와 카타르는 석유 이후 시대를 준비한다. 요르단은 안정을 유지하며 난민을 받아들였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부에서 자치를 이루었다. 시리아도 평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리비아도, 예멘도, 아프가니스탄도. 하지만 그 길은 멀고 험하다. 100년 전 강대국들이 그은 국경선의 저주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로렌스는 『지혜의 일곱 기둥』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랍인들에게 집을 지을 기초를 주었지만, 그 집은 우리의 피로 지어졌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중동은 여전히 그 집을 짓고 있다. 언제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중동의 미래는 중동인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세가 그은 국경선, 외세가 세운 정권, 외세가 일으킨 전쟁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로렌스가 깨달은 것처럼, 진정한 독립은 스스로 쟁취할 때 의미가 있다. 사막 위에 그어진 선은 지울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선을 넘어 손을 맞잡을 수는 있다. 그것이 로렌스가, 그리고 100년간 고통받은 중동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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