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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상식

일본 쇄국 정책 속 유일한 무역항,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by urmore 202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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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에도 시대, 일본은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그 문을 열어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네덜란드였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유일한 무역 창구가 된 공간, 그것이 데지마(出島)다.

일본이 세계와 통하는 단 하나의 창이었던 이 작은 섬에서 시작된 교류는 훗날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를 근대화의 질풍노도로 이끌게 된다. 과연 네덜란드는 어떻게 일본과 독점 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시작된 교류는 훗날 일본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데지마의 탄생: 기독교 탄압과 무역의 딜레마

데지마는 일본 나가사키 항에 위치한 인공 섬으로, 면적은 약 15,000㎡(4,000평)에 불과하다. 데지마가 건설된 것은 1636년, 일본 막부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섬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예수회의 기독교 포교와 이를 탄압하기 위한 막부의 정치 공작이 연관되어 있다.

18세기 데지마 지도
18세기 데지마 지도 © Wikipedia

예수회의 동방 진출과 나가사키 개항

때는 1549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된다. 그는 가톨릭 남자 수도 단체인 예수회의 창시자로, 인도와 일본 등지에 가톨릭을 전파하며 '동양의 사도'로 불리는 인물이다.

당시 예수회는 동방 선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동방국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 건축, 토목, 천문학, 수학 등 과학 분야에 뛰어난 선교사를 선발해 파견했다. 이들은 선교지에 교회, 학교, 병원 등을 지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한편, 현장의 군주에게는 총과 대포 등 서양 무기를 지원하며 군사력 증강에 도움을 주었다.

이에 나가사키의 다이묘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1533-1587)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1571년 나가사키가 개항됐다. 그러자 유럽의 상선들이 내항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유럽 상인의 선두주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아시아의 교두보로 삼았고, 그 후 부지런히 세력을 확장하여 마카오에 교역지를 설립했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가 개항되자 일본과 본격적으로 교역을 시도했는데,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조총, 화약, 중국산 비단을 팔고, 일본이 결제한 은으로 중국의 견직물이나 도자기를 사서 유럽에 수출했다.

기독교의 확산과 막부의 위기감

그와 동시에 예수회의 포교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며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전국시대의 오랜 혼란기를 겪은 백성들은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평등사상에서 위로를 받고 구원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은 일본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본질적으로 일본은 신도(神道)의 국가로, 모든 자연이 곧 신이며, 그중에서도 제일 높은 신은 주신(主神)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이라 일컬어지는 천황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인정하면 천황도 쇼군도 그 아래에 있는 셈이니, 일본 조정에서는 예수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압도적인 무기에 위기를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선교사 퇴거를 명하는 바테렌 추방령(Bateren Edict)을 내렸다. 여기서 바테렌은 '신부(Padre)'의 일본식 발음이다. 심지어 히데요시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와 신자들을 나가사키로 데려와 처형하기까지 했다.

16-17세기 나가사키 항구
16-17세기 나가사키 항구 © Wikipedia

그러면서도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있는 과학 기술, 즉 총포와 화약에는 관심이 많았다. 또한 외국과의 무역이 일본 내 교역보다 훨씬 이득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무역만은 용인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막부는 기독교의 포교를 금지하고 포르투갈 상인을 한곳에 모아 감시하기로 하는데, 그 결과 1636년 나가사키 앞바다에 조성된 인공섬이 바로 데지마다. 막부는 건설 비용을 나가사키의 부유한 상공업자(町衆, 마치슈)들에게 우선 부담하게 하고, 나중에 입주할 외국 상인들에게 임대료를 지불하여 보상받도록 했다.

시마바라의 난과 네덜란드의 등장

그렇게 데지마는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들의 전용 구역이 되었는데, 데지마가 네덜란드에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개창한 후에도 기독교인의 탄압이 계속되자 신자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1637년, 일본 규슈의 시마바라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만들어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켰다. 그때 마침 나가사키 앞바다를 지나가던 네덜란드의 무장상선이 이 사실을 알고 막부와 딜을 시도했다.

우리가 반란군을 진압할 테니 대신 무역권을 주십시오.

서구의 신식 대포 성능을 익히 알고 있던 일본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결국 시마바라의 난은 네덜란드 상선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막부는 포르투갈인을 완전히 추방하였고(1639년), 데지마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자 데지마 건설에 자금을 투자했던 지역 유지들의 불만이 일어났고, 이에 막부는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을 데지마로 옮겼다.

이로써 데지마는 네덜란드의 손에 넘어가며 1641~1859년 동안 200년 넘게 독점 무역이 이루어진다. 즉, 일본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 상인이 드나들 수 있는 항구이자 해외 문물 유입 창구가 된 것이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허용한 이유: 종교와 실리의 균형

그렇다면 일본은 왜 서양 국가들 중 유독 네덜란드만 받아들였을까? 그 배경에는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기독교가 있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기독교가 사회 질서를 해친다고 보고, 이를 전파한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고, 종교보다는 무역에 집중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달리 일본어를 배우는 등 일본 문화를 존중했고, 선교 활동도 일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태도가 막부의 신뢰를 얻으면서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의 독점 무역이 시작된 것이었다.

데지마 내부 생활 모습
데지마 내부 생활 모습 © Wikipedia

이는 일본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에도막부는 1년에 한 번 네덜란드 상단을 육지로 불러들여 국제 흐름을 전해 들음으로써 서양을 이해했다. 이때 작성된 보고서를 '오란다풍설서'라고 불렀다. 그렇게 보면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서양 문물을 습득한 셈이다.

데지마가 가져온 서양 문물: “오란다”의 시대와 난학

당시 네덜란드는 서구 사회의 상징이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는 '오란다(オランダ)'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이는 네덜란드(Holland)를 음차한 '화란(和蘭)'의 일본식 발음이다.

  • 서양인: 오란다상(オランダさん)
  • 유럽식 유리병: 오란다 유리(オランダガラス)
  • 서양 꽃 장식: 오란다 꽃(オランダ花)
  • 금붕어 품종: 오란다 사자머리(オランダ獅子頭)

이 외에도 웨하스처럼 생긴 네덜란드식 와플이 아시아의 쌀과자 형태로 변형되어 '오란다 과자(オランダオカシ)'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난학(蘭學)의 탄생: 일본 근대화의 지적 기반

또한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을 오란다(和蘭)에서 '란' 자를 따 '난학(蘭學)'이라 불렀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실학을 장려하고,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 정책을 해제했으며, 학자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하여 서양책을 번역하게 했다.

해체신서
해체신서 © Wikipedia

특히 난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의학이었다.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가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는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의 제자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 1757-1827)는 1785년, 최초의 난학 사숙인 지란당(芝蘭堂)을 설립했다.

이후 수많은 난학 기관이 세워지며, 이를 통해 탄생한 합리적 사고와 인간 평등사상은 에도 막부 말기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서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해외 지식의 유입을 통제하는 막부의 쇄국체제를 비판하는 사고도 나타났다.

흑선의 충격과 데지마의 몰락

그러던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검은 증기선(黒船)을 이끌고 우라가(지금의 요코스카)에 당도하며 일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외에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일본에 비해, 서양은 이미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결과 아시아 굴지의 강대국이던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무너졌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미국의 무력시위에 굴복하며,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했다.

페리 함대 내항
페리 함대 내항 © 요코스카시

뒤이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 잇달아 조약을 맺었고, 1859년에는 요코하마, 나가사키, 니가타, 고베가 추가로 개항되면서 데지마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서양과의 통로는 더 이상 작은 외딴섬이 아닌, 도시 전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흑선의 충격은 단순히 개항에서 끝나지 않았다. 1868년 도쿠가와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인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이들은 과거를 완전히 뒤엎는 개혁을 시작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징병제를 도입했으며, 근대식 헌법과 의회를 구성했다. 군국주의의 씨앗도 이때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 산업기술, 군사체계를 압도적인 속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데지마 무역은 종말을 고하고, 일본은 개항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데지마의 역사적 의미: 근대화의 숨은 원동력

데지마는 단순한 무역항이 아니었다. 쇄국과 개방, 충돌과 선택의 기로에서 일본이 치열하게 세계와 마주했던 유일한 창구였다.
근대의 강제적인 개항 이전부터 연구해 왔던 난학 덕분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개항 이후 빠르게 신문물에 적응할 수 있었으며, 막부는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데지마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복원된 데지마
복원된 데지마 © 나가사키 공식 관광 사이트

오늘날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쇄국 정책 시대, 외국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이곳은 현재 외부인과 나가사키를 소통케 해주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작은 섬 하나가 만들어낸 근대와 현대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참으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