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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상식

모아이는 왜 쓰러졌나? 이스터섬 문명의 몰락이 주는 경고

by urmore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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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길고 좁은 나라로 유명한 칠레. 이곳은 남북으로 4,270km, 동서로 175km의 크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좁고 긴 땅에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 그리고 남극의 빙하까지 매우 다양한 생태계가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칠레에서 서쪽으로 3,700km가 떨어진 지점에는 칠레의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이스터섬(Easter Island)이 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남아메리카보다 폴리네시아에 더 가까운 이 외딴섬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바로 새의 머리가 새겨진 암각화와 모아이(Moai)라 불리는 거대한 석상이 그 증거다. 도대체 이 암각화는 누가 그렸으며, 수십 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석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스터섬의 모아이
이스터섬의 모아이 © Imagina Rapa Nui

호투 마투아 왕과 폴리네시아인의 이주, 모아이의 탄생

이스터섬은 원래 포이케(Poike), 라노 카우(Rano Kau), 테레바카(Terevaka)의 세 화산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후 이들 화산이 분출하면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 하나의 섬으로 합쳐졌고, 그 덕분에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담수호가 형성되면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이루어졌다.

이스터섬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1~8세기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4세기경 흑요석을 거래하던 멜라네시아인들이 타히티를 거쳐 이곳에 도착하고, 이후 7~8세기경 히바(Hiva) 섬의 왕 호투 마투아(Hotu Matu'a)가 전쟁을 피해 7개 부족을 이끌고 이주했다는 것이다.

호투 마투아가 섬을 통치하게 되자 원주민들은 그와 일곱 부족의 족장을 기리기 위해 아후 아키비(Ahu Akivi)라는 모아이 석상 7개를 세웠다. 이스터섬의 다른 모아이들이 해안가에서 섬을 바라보는 구조라면, 이곳의 모아이는 내륙의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형태이며, 7개의 크기가 모두 크고 고른 것으로 보아 모아이 중에서도 최상위 계층을 나타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후 아키비
아후 아키비 © Wikipedia

이렇듯 모아이는 그 시대의 통치자를 기리기 위한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호투 마투아가 죽은 후 부족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부족의 세력을 상징하는 모아이의 크기도 점점 커져갔다. 그 바람에 거대한 모아이를 만들고 이동시키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면서 섬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모아이 파괴 운동과 조인 숭배 사상

16세기 무렵, 무리한 모아이 제조와 식량 고갈로 지친 사람들은 급기야 서로의 모아이를 파괴하기 이르렀다. 그렇게 모아이를 숭배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대신 나타난 신흥 종교가 바로 탕가타 마누(Tangata Manu)였다.

조인 암각화
조인 암각화 © Imagina Rapa Nui

탕가타 마누란 새(Manu)의 형상을 한 인간(Tangata)이란 뜻으로, 이때쯤 사람들은 새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고립된 섬에서 새와 새가 낳은 알만이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보며 땅과 바다와 하늘을 잇는 매개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섬의 통치자도 왕족에 의한 세습제가 아닌, 바다 건너 돌섬에서 새의 알을 가장 먼저 가져오는 자로 정했으며, 승자를 기리기 위한 세리머니로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스터 섬을 이루는 3대 화산 중 하나인 라노 카우 정상에는 오롱고(Orongo)라는 돌로 지은 집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조인(鳥人) 의식이 행해진 장소다. 그 주위로 새의 머리를 하고 있는 조인(鳥人)이 새겨진 암각화와 조인 의식의 벽화가 그려진 동굴 아나 카이 탕가타(Ana Kai Tangata)도 발견됐다. 이 동굴의 이름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 아나(Ana): '동굴'
  • 카이(Kai): '먹다'
  • 탕가타(Tangata): '사람'

즉, 조인 의식의 하이라이트인 '식인을 했던 동굴'이란 뜻이다. 새를 숭배했기에 새의 알을 가장 먼저 쟁취한 자가 통치자가 됐으며, 왕이 선정될 때마다 바위에는 조인의 부조가 새겨졌고, 패자는 식인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아나 카이 탕가타의 조인 벽화 © Wikimedia Commons

외부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문화 말살

조인 의식은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침 그가 도착한 날이 부활절이어서 섬의 이름을 '이스터섬(Easter Island)'이라 명명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774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이스터섬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미 오세아니아주를 탐험했던 제임스 쿡은 이곳에 비슷한 인종이 분포하는 것을 보며 그들이 라파누이족이란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원주민들은 섬의 이름을 이스터섬 대신 민족의 이름을 따 라파누이(Rapa Nui)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의 정체성도 잠시, 그때까지 계속됐던 모아이 쓰러뜨리기 운동과 조인 의식이 외부에 알려지며 수많은 정복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결과 원주민들은 미국의 포경선과 페루의 노예 상인에 의해 팔려갔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개종을 강요당하면서 섬의 문화는 서서히 말살되어 갔다.

그 후 1888년, 이스터섬이 칠레에 합병되자 원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칠레 시민이 되었고, 그동안 자행되어 왔던 모아이 파괴 운동부터 선교사에 의한 개종까지 여러 내적 외적 요인으로 인해 이스터 문명은 거의 잊히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 이스터섬 원주민들은 모아이에 붙여진 이름의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초대 왕 호투 마투아가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롱고롱고(Rongorongo) 서판의 상형문자 또한 해독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문명에 던지는 경고

이스터섬 사람들은 곤경에 빠졌지만 피신할 곳이 없었다. 구원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지구인이 곤경에 빠진다면 어디에,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 중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립된 섬에서 한정된 자원을 남발하다 쇠퇴해 버린 이스터 문명은, 오늘날 지구라는 고립된 행성에서 기후 위기와 SNS 과시욕에 당면한 현대인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문명의 성장은 휘황찬란한 무언가를 덧입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들과의 공존에서 비롯된다. 지구의 미래가 이스터 문명의 붕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되지 않도록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 공존의 키를 터득하는 것이 지금 우리 현대인들이 해야 할 몫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