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본 사람이라면 하트빛으로 물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을 기억할 것이다. 비정한 도시가 한순간 로맨틱한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이제 뉴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뉴욕의 대표적인 전망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뉴욕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못지않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마천루가 있다. 바로 크라이슬러 빌딩(Chrysler Building)이다.
같은 듯 다른 두 마천루: 경쟁이 야기한 불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크라이슬러 빌딩은 언뜻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 같지만, 꼭대기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직선적인 첨탑으로 마무리된 반면, 크라이슬러 빌딩은 우아한 곡선의 장식 돔으로 완성되어 아르데코 양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위치상 둘 다 뉴욕 맨해튼의 중심부에 있고, 멀리서 보면 높이도 비슷해서 자칫 헷갈릴 수 있다. 두 건물의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혹시 '마천루의 저주'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어떤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최대한 빨리 그 나라의 주식 시장에서 빠져나오라.
- 존 캐스티의 <대중의 직관> 중
1920~30년대 록펠러, 카네기, 포드로 대표되는 산업왕국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높은 빌딩을 세우는 것이 부의 상징이었다. 헨리 포드에 이어 자동차왕으로 등극한 월터 크라이슬러(Walter Chrysler)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30년,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인 318m의 크라이슬러 빌딩을 완공하며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년 후, 뉴욕주가 지원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381m)이 세워지며 그만 왕좌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이었다. 1929년, 월스트리트의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이 불황은 호황기에 무리하게 세워진 마천루들을 한순간에 ‘공실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특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2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공간을 임대하지 못해 'Empty State Building'이라는 오명이 붙었고, 크라이슬러 빌딩 역시 임차인을 구하지 못해 파산 위기를 맞았다.

그 후에도 이러한 패턴은 반복되었다.
- 1973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완공 → 오일 쇼크 발생
- 1998년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완공 → 1997년 아시아 IMF 위기
이런 사례들을 근거로 도이치방크의 애널리스트 앤드류 로런스(Andrew Lawrence)가 1999년, '마천루의 저주 가설(Skyscraper Index)'을 발표했다. 즉, 초고층 빌딩을 지을 때는 경기가 호황이었다가 완공될 때 불황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시그널을 읽는 지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주인공 애니(멕 라이언)는 말한다.
It's a sign.
작은 신호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찾는 그녀의 태도는 앤드류 로런스의 ‘마천루의 저주’가 던지는 메시지와 닮았다. 즉, 모든 것이 잘 될 때일수록 불안의 신호를 읽으라는 것이다.
로맨틱한 마천루의 불빛도 알고 보면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견뎌가며 지금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미국의 야망과 좌절, 그리고 회복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대공황의 공실을 견뎌낸 이 빌딩들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랜드마크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호'가 아닐까?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에 대비하고 잘 견뎌내면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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